生きるための自由研究

脱・引きこもりできそうにない半引きこもりです。

カネを使わない楽しみを見つける

 私たちは、楽しみや満足をカネを払って手に入れることに慣れてしまっている。

 

 カネがある者は、商品を買い続けて欲求を持続的に満たすことができる。

 

 しかし、貧乏人は、カネがないので、カネを払って商品を購入する市場経済の中での欲求充足ができない。

 

 カネを払って手に入れる商品やサービス以外にも、楽しみや満足を得る手段はある。

 

・自分の食べる野菜をつくる。

・自然の中で遊ぶ。

・絵を描いたり、文章や詩を書く。

・映画を見たり、催し物に参加して楽しむ。

・他者との交流を楽しむ。

 

 カネをかけずに楽しみを得ることは質素に思われるが、当人がそれによって大きな満足を得られるのであれば、それは贅沢(バタイユは「蕩尽」と言った)に変容する。

 

 貧乏人が人生を豊かにするには、カネを使わない楽しみ=贅沢をつくれるかにかかってくる。

 

 カネでは買えない贅沢をして人生を楽しみたい。

危険な道を進んでしまう人

 安全な道を進める人もいれば、危険な道ばかりを進む人がいる。

 

 安全な道を進む人からは、危険な道を進む人の行動原理が理解できない。逆に、危険な道を進む人からは、どうやれば安全な道を進むことができるのかが分からない。

 

 僕からしたら、安全な道を進める人は、何もしなくても安全な道を進むように遺伝的にインプットされているように見える。

 

 意図してか意図しなくてか、安全な道から外れてしまう人がいる。

 

 自らの意思で危険な道を選ぶ人は、神経が図太くて世の中を渡っていけるが、意図せずに安全な道から外れてしまう人もいるだろう。

 

 私は、大学院生活をもんもんとした気分で過ごし、精神障害で休んでいる間に、いつの間にか安全な道から外れてしまった。 自己責任と言われればそれまでだが、本人も危険な道を進みたくて安全な道を外れたわけではない。よかれと思って選んだ道が危険な道だったのだ。

 

 危険な道をよかれと思って進んでると、しんどいわけで・・・

 

  なので、意図せず安全な道から外れて困った人が、どう楽しく生きるかを示していくことが僕の仕事なのだと感じる。

カネがない人が生を楽しむには

正規雇用の路線から外れてしまうと、起業などで頑張れる一部の人を除くと、カネが稼げない貧乏な生活が待っている。

 

正規雇用でない時給が低い仕事でたくさん稼ごうと思ったら、労働時間を極端に長くする以外に方法がない。

 

仕事が苦役だと感じるならば、仕事を減らして、稼げるカネは無くなるが、カネが無くても卑屈にならず前を向いて生きていける方法を見つけ出したい。

 

カネがある人は、モノを買ったり、友達とグルメを楽しんだりと購買力によって消費を享受できる。

 

カネが無い人は、カネをつかった消費を手段とする楽しみを享受するのが無理そうなので、別の方法で生を充溢させなければいけない。

 

自分がやって夢中になることに没頭するのが一つの方法である。

 

私は時間を潰すのが下手な人間だが、読書し、ブログを書き、農作業をすることが没頭できることである。(読書は最近モチベーションの低下のためできていない) 何も無いところから楽しみを生める能力が必要だろうな。

 

 

夢中になれるコトを大切にする。

 それをやっていると、夢中になり、あっという間に時間が過ぎて、充実感に満たされるコトがある。

 

 私は、それが非生産的なコトだとしても、幸せに浸れるコトとして大切にしたい。 私にとって幸せを感じるのは、ブログを書いたり、農作業などで軽く肉体労働をすることにある。

 

 自分の食べる野菜をつくったり、仲間と一緒に協働で作業をおこなうなど、肉体労働をして汗を流すと気持ちがいい。

 

 ただし、気持ちよさを感じるのは自分のペースで作業ができる時に限られる。金銭的利益のために効率性や労働強度の高い作業を強いられるならば、その作業は苦役に変わってしまう。

 

 私は農業は、自分が食べるためにのんびりとやるのが幸せと感じるため、その作業に身をおける時間を増やしていきたい。

 

 ジル・ドゥルーズは、自分が無意識のうちに何かに夢中になる(=とりさらわれる)空間や状況に自分を置いて、考えたり楽しむ瞬間を《待ち構える》のだと、日常の幸せについて語ったそうだ(國分功一郎『暇と退屈の倫理学太田出版より)。ドゥルーズにとって、とりさらわれる場所は美術館であった。

 

 日常を豊かにするには、自分が夢中になり幸せに感じる場所や状況に自分をもっていくことが大切なんだと思う。

엔데의 모모【지금 이 순간을 아낀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지금이라는 순간을 아끼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경청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어느 날 동네 낡은 투기장에 모모라는 소녀가 나타났다. 모모는 투기장에서 먹고 자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호기심 때문에 모모를 찾아왔지만 어느새 모모와 대화를 줄기기 위해모모를 찾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다.

 

  모모에게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모와 이야기를 함으로써 고민을 해소할 수 있었다. 특별히 모모에게 초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모모는 단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교류하고, 정직함과 섬세함을 가지고 소통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엔데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것은 의존증 등의 정신 장애 자조 그룹의 모임에서 실천되고 있는 “정직하게 말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살아갈 힘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동네에 시간은행에서 온 잿빛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 남자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지금의 생활 속에서 낭비하는 시간을 줄이면 장래에 줄인 시간만큼의 좋은 시간을 즐길 수 있다”며 시간을 절약하라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돈이 되지 않는 행위나 비효율적인 행위를 낭비로 단정하며 줄여가는 것이다.

 

 어느 이발소 아저씨는 그 때까지는 일하는 틈틈이 마음에 있는 동네의 친한 아줌마와 만나서 대화를 즐겨 하곤 했다. 그러나 잿빛 남자들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시간 낭비다. 대화하지 말고 일만 하면 된다”며 일의 효율성만을 요구했다.

 

 동네 사람들은 일의 효율성만 추구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과의 교류 등을 시간 낭비로 여기게 되어 동네에 활기가 없어지고 결국 온 동네가 잿빛이 되고 말았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시간 낭비가 되면서 모모와 이야기하러 더 이상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모모는 동네 사람들의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잿빛 남자들과 싸우게 된다.

 

 우리는 장래의 이득만을 최우선시하며 지금 이 순간인 현재를 희생시키는 “개미와 베짱이” 식의 삶의 방식을 강제당하고 있다. “장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미래를 위해 힘든 것을 견뎌내고 일을 해야 한다”.

 

 물론 장래를 대비하여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지금이라는 시간도 풍요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 장래의 이득보다도 현재의 친구들과의 대화나 관계를 풍요롭게 해 가고 싶다.

무엇이 소중하고 행복한가를 생각하다

 생산활동은 가치 있는 것으로, 비생산활동은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예를 들면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즐기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황홀해하는 순간 같은 것이다.

 

 채소를 키울 때, 판매를 목적으로 채소를 재배하는데 병 등으로 인해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는 채소의 수확이 잘 안 된다면 화가 날 것이다. 이 것은 채소 재배를 즐거움으로 하는 게 아니라 상품을 만드는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생산활동). 자기가 먹기 위해 즐겁게 농사를 짓고 있으면 채소가 잘 안 자라도 채소를 키우는 과정을 즐기게 되고, 자기가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까 화가 나지 않는다.

 

 생산활동으로서의 일을 함으로써 즐거움과 생의 풍요로움을 실감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즐거움이나 풍요로움을 느끼는 것이 생산활동이든 비생산활동이든 그 사이에 우열을 가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바타이유는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비생산적인 소비를 인생을 즐기는 것이고 생산활동은 소비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 비생산적인 소비(제전, 호화로운 건물, 유희, 예술 등)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서구사회는 생산과 누적과 같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수단에 불과한 활동만을 중요시해왔다. 소비가 긍정되는 경우에도 그 소비는 생산에 공헌하는 소비로 한정되었다 ” (酒井健バタイユ入門』ちくま新書、p.104)

 

 우리는 금전적인 이익을 만들어내는 일만을 유용하다고 여기며 높은 가치를 매기고 있다. 일을 이유로 소중한 놀이를 희생시키고 가족이나 친구와 즐겁게 지내는 시간보다도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비록 비생산적인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당사자가 행복이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직업으로서의 일이 가장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낮은 지위로 놓여야 된다.

何が大切で幸せなのか、考える

生産活動をすることが価値あることとされ、非生産活動はムダなこととされる。

 

 私たちが、幸せを感じるのは、人との交流を楽しんだり(交歓)、美しい景色を見てうっとりするような瞬間にある。生産活動が幸せを生み出すとは限らない。

 

 野菜を育てる時、販売目的で野菜を栽培して、病気などで商品にできる野菜の収穫がうまくいかないと、イライラした気分になる。これは、野菜作りを楽しみでやっているのではなく商品を作り出す労働をおこなっているからである(生産活動)。自分たちが食べるために楽しく野菜作りをやっているのなら、野菜の出来が悪くても、野菜を育てる過程を楽しみ、自分たちで楽しんで食べられるので、イライラは生まれない。

 

 仕事で生きがいを実感する人もいるかもしれないが、楽しさや豊かさを感じるコトが生産活動であれ非生産活動であれ、それらの間に優劣をつけるのが問題である。

 

 バタイユは、人間にとって大切なのは非生産的な消費でもって生を楽しむことであり、生産活動は消費に従属されるべきコトだとしている。

 

 「人間の生の真の目的が非生産的な消費(祭典、豪奢な大建造物、遊戯、見世物、芸術etc…)にあるにもかかわらず、近代の西欧社会は生産と蓄積という人間の生にとっては手段の地位にある活動ばかりを重視してきた。消費が肯定されてもその消費は生産に貢献する消費でしかなかった。」(酒井健バタイユ入門』ちくま新書、p.104)

 

 私たちはカネを生み出す仕事のみを、有用なコトとして高い価値を与えている。仕事を理由に大切な遊びを犠牲にして、家族や友人と楽しく過ごす時間よりも仕事を優位なコトとしている。

 

 非生産的な行為であろうとも、それが当人にとって幸せや生きがいを感じさせるコトなら、それは一番大切なことなのだ。仕事が一番の幸せではないならば、それは低い地位に置かれるべきだ。